눈부신 안부
발췌
애써 잊고 살려고 했지만 잊히지 않아, 때로는 그리움으로 때로는 후회와 자책으로 환기되던 풍경들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지극한 정성과 수고가 필요하니까.”
그즈음을 생각하면 차례로 떠오르는 것들. 햇살 아래 부서져내리던, 구시가지 광장 한복판에서 떨어지는 분수의 물줄기. 테라스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있으면 달콤함에 이끌려 날아오던 벌들. 초록으로 빛나던 여름 나무들. 오래된 건물의 벽을 달구던 열기. 고지를 모른 채 상승 곡선만을 그리며 고조되던 감정의 음률. 수신호를 하기 위해 한 팔을 허공으로 뻗은 채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미끄러지듯 달리거나, 스스로 어른인 줄 알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홀로 뒷짐 지고 걷던 G시 곳곳의 거리들. 카를 마르크스나 프리드리히 뵐러처럼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달고 있던.
전쟁중 폭격을 덜 받은 덕분에 살아남은 도시의 지붕들을 물들이는 저녁노을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만이 지닌 아름답고도 슬픈 매혹을 가르쳐주던 시간.
선자 이모가 첫사랑의 이름을 듣는다면 동요할 수밖에 없으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숨기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게 사랑일 테니까. 봄볕이 나뭇가지에 하는 일이 그러하듯 거부하려 해도 저절로 꽃망울을 터뜨리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무엇이든 움켜쥐고 흔드는 바람처럼 우리의 존재를 송두리째 떨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언제나 표정이 적어 화난 것처럼 보이던 선자 이모의 얼굴에 드리워진 꽃그늘이 바람이 불 때마다 레이스처럼 어른거
하지만 해질녘 도서관 밖으로 나와서 버스를 타기 위해 푸른빛과 흰빛으로 일렁이는 강변을 따라 걷다보면 어김없이 그 단어들에서 어떤 결여가 느껴지곤 했다. 예년보다 이르게 핀 벚꽃 아래를 걷는 사람들을 목격한 오후 같은 때에는 더더욱. 보행자 신호등의 불빛이 바뀌길 기다리며 바라보는 저편에는 해질녘의 빛이 내려앉은 자리마다 금빛 테두리가 환했다. 이따금씩
다른 사람은 나처럼 고통스럽지 않길 바라는 대신 다른 사람도 적어도 나만큼은 고통스러웠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인간이 나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건 내가 처음으로 또렷하게 마주한 내 안의 악의였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때로 체념이 필요했다.